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카다 게이스케 (문단 편집) === [[2.26 사건]](2.26 쿠데타) === 2월 20일, 오카다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뤘다. 당시 오카다 제독이 속한 입헌민정당이 대박을 치면서 내각이 상당히 안정화에 들어갔었는데, 불과 6일 만에 육군 황도파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완전히 쑥대밭이 된다. 습격은 2월 26일 새벽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전부터 서로 접촉하던 육군 황도파 장교들이 부대의 휘하 [[장병]]들을 동원해 멋대로 [[도쿄]]를 봉쇄하고 [[수상관저|총리 관저]]와 원로들의 저택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원로들은 26일 전날 밤에 있었던 만찬 연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다들 술에 절어있었다고 한다. 황도파는 몇 개의 무리로 갈라져 아래 사람들을 죽이러 몰려갔다. || 암살 목표 || 암살 여부 || || 총리 오카다 게이스케 || 실패 || || 내대신[* 내무대신과는 다른 직책이다.] [[사이토 마코토]] || 성공 || || 대장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 성공 || || 교육총감 [[와타나베 죠타로]] || 성공 || ||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 || 실패 || ||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 || 실패 || || 원로 [[마키노 노부아키]][*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이자 [[요시다 시게루]]의 장인.] || 실패 || 사이토 마코토 제독, 와타나베 죠타로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했으며,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 제독은 여러 군데 총을 맞았지만 황도파의 뒷처리가 미숙한 바람에 진압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사이온지 긴모치와 마키노 노부아키는 헌병이 집 앞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한편, 총리 관저로 몰려간 황도파 무리는 거기서 [[피바다]]를 연출했는데, 그야말로 '''[[학살|거기서 보이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베고 쏴죽인]] 덕분에''' 나중에는 목표였던 오카다 제독을 죽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당시 오카다 제독은 관저 시종들의 도움으로 벽장의 [[빨래]] 더미에 숨어서 위기를 넘겼다. 대신 그와 생김새가 비슷했던 [[매부]][* 오카다의 여동생과 결혼했다.] 마츠오 덴조가 오카다로 위장해서 황도파를 유인하다가 [[사살]]당했다.[* 마츠오 덴조는 오카다 제독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게다가 오카다 제독이 수상이 되기 전 두 번이나 아내를 잃어 수상이 될 때는 홀몸이었는데 이 때 수상 관저에서 같이 살면서 이리저리 도움을 주었던 각별한 사이였기에 저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사망 당시 그는 내각총리대신비서관 육군 대좌의 신분으로 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황도파는 자신들이 오카다 제독을 죽인 줄 알고 다음 날 자기네 멋대로 총리 관저에서 오카다 제독의 장례식을 치르게 했고, 오카다 제독은 여전히 빨래 더미 속에 숨어 있다가 그를 목격한 육군 헌병조장([[상사(계급)|상사]])의 도움으로 시체로 위장해 이틀 만에 관저에서 탈출해 [[황거]]로 갔다. 순식간에 전직 총리 두 명(사이토, 다카하시)이 목숨을 잃었다. 사이온지는 살아남았으나 덕분에 늘그막에 [[고노에 후미마로]]가 뒤통수를 치고 군부가 깽판치는걸 모두 보고 죽게 되었고 스즈키 간타로도 [[태평양 전쟁]] 마지막을 지키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